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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발해인 이유

714년 5월 18일, 한 무리의 당나라 사신들이 요동반도 끝자락에서 배를 타기 전에 돌에 글을 새겼다. 근처에는 이를 기념하여 미리 파둔 두 개의 우물도 있었다. 사신의 대표는 홍려경(鴻臚卿) 최흔(崔忻)이라는 인물로, 바로 전 해에 당나라에서 발해로 파견되어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이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이 먼저 발해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었고, 그를 따라서 대조영이 들째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로 보냈었다. 그 아들이 이번에 최흔과 함께 발해로 돌아온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우물은 없어졌지만 이 돌만큼은 1,200년 가까이 지나서까지도 그곳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승리하자 기념물로 이 돌을 강제로 가져갔다..

신라인 설계두, 열린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다

645년 여름 6월, 당나라의 대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 고구려의 주요 성채를 차례차례 함락시킨 데 이어 이번에는 안시성(安市城) 북쪽까지 진군해왔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요동성에서 최대한 막아섰어야 했는데, 당 태종도 만만치 않은 영걸이었다. 수 양제가 눈물을 삼키고 회군해야 했던 요동성을 이번에 무너뜨린 것은 대고구려 전선에서 신의 한 수가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얻은 군량미 50만 석은 가볍게 출정해온 당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급해진 것은 고구려군이었다. 당초 안시성이 최전선이 될 가능성은 낮았기에 방비가 완벽하지 못한 것을 우려한 고구려는 총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15만 명이 넘는 대규모 지원군을 편성하여 급히 파병하였다. 당 태종은 고구려 ..

연개소문의 주민번호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또 다른 이름은 개금(蓋金)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이 고구려인의 발음을 듣고 그대로 기록한 것은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였다. 즉 소문=수미=금(金)이니 곧 고대한국어로 쇠라는 뜻을 한자로 써서 금이 되는 것이다. 그의 집안은 고구려 말에 소위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중리(中裏), 곧 중리위두대형(3품)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도 중리를 거쳐 막리지(2품)를, 그리고 아버지는 드디어 막리지에 대대로(1품)까지 고구려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아버지 사후에 젊은 연개소문은 정적들의 견제로 인해 대대로 직위를 승계하지 못하게 되자 이들에게 저자세로 읍소하면서 겨우 설득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앙심을 품고는 641년(중국측 역사서에는..

고구려 관등과 일본어 숫자

외국어를 배우다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일본어를 배우던 시절 의외로 고구려어가 이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연구자들이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통해 밝혀냈듯이, 고구려어로 3은 밀(密), 5는 우차(于次), 7은 난은(難隱), 10은 덕(德)이라는 한자로 표현되는데, 흥미롭게도 일본어에서도 비슷하게 3은 미츠(みつ), 5는 이츠(いつ), 7은 나노(なの), 10은 토오(とお)로 읽힌다. (일본어는 한국어보다 숫자를 읽는 방식이 좀 더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두 언어의 많은 명사들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외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에서도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오늘은 한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 대상..

신라의 서쪽, 이서국 미스터리

역사책을 읽다보면 간혹 무언가 생소하면서도 어색하면서 한편으로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좀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처음 《삼국유사》를 읽을 때였다. 첫 시작부터 고조선을 위시하여 부여, 고구려, 발해, 가야 등 대충 이름이라도 들어봤던 어느 정도 친숙한 고유명사들이 쭉 등장하니 그렇구나 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나라 이름이 나타났는데 이건 뭘까 싶었던 기억이 있다. 바로 이서국(伊西國)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때는 그저 신기했던 느낌을 가지고 넘어갔었는데 이후에도 종종 다시 읽게 될 때마다 그 이름을 마주치는 순간, 도대체 여긴 왜 다른 나름 유명한 국가들 사이에서 마치 동급처럼 한 꼭지 기록으로 남아는 있으면서 자세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을까 싶어 살짝은 답답했던 마음이 ..

평강공주는 평강공주가 아니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화책, 그림책, 소설책, 심지어 에세이로까지 이미 수십 종이 출간되어 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 동화같은 이야기는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사실이며, 여러 가지 당시 사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글이기도 하다. 다만 그 원전을 자세히 읽어볼 일은 많이들 없었을 테고, 특히나 평강공주가 과연 왜 평강공주였는지 의문을 가져본 사람은 더욱 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원전을 토대로 주인공인 평강공주의 잘못 알려진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보도록 하겠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의 사람이었다. 외모는 못 생겨서 남들의 웃음을 샀지만, 마음만은 정말 착한 친구였다. 너무 가난해서 항상 음식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너..

을파소와 복지국가 고구려

고구려인 을파소(乙巴素)는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다만 제2대 유리왕(琉璃王) 때의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신분제 질서에 기반하고 있던 고대사회에서 대신의 자손이라면 상당한 귀족 집안이었을 텐데, 어떤 일로 인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가문이 몰락한 때문인지 을파소는 서압록곡(西鴨淥谷)의 좌물촌(左勿村)이라는 해안가에 가까운 지역에서 농사 지으며 살고 있었다. 아마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그는 고구려 사회에서 다시 상층부로 진입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이다. 서기 190년 음력 9월의 가을 날씨가 완연한 어느 날,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주축이 된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왕가의 외척들로 권..

신라인 강수의 사랑 이야기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결혼이란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애할 때는 몰라도 결혼이 눈 앞에 다가오면 누구나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결혼은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간혹 한 순간 외모에 넋을 잃고 불꽃같은 사랑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순전히 호르몬 탓이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동물도 얼마든지 한 눈에 반하고 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오히려 진정 사랑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다. 어차피 식을 수밖에 없는 감성만으로는 결혼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오히려 호르몬의 영향으로 한 눈 팔기 십상인 것이 감성에 기반을 둔 1차원적인 사랑일 따름이다. 사랑이란 결국 냉철한 이성과 그에 기반한 서로간의 믿음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관계라고 하면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