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발해가 발해인 이유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2. 5. 11:05

   714년 5월 18일, 한 무리의 당나라 사신들이 요동반도 끝자락에서 배를 타기 전에 돌에 글을 새겼다. 근처에는 이를 기념하여 미리 파둔 두 개의 우물도 있었다. 사신의 대표는 홍려경(鴻臚卿) 최흔(崔忻)이라는 인물로, 바로 전 해에 당나라에서 발해로 파견되어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이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이 먼저 발해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었고, 그를 따라서 대조영이 들째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로 보냈었다. 그 아들이 이번에 최흔과 함께 발해로 돌아온 것이었다.

최흔의 돌 - Wikipedia


   시간이 지나 우물은 없어졌지만 이 돌만큼은 1,200년 가까이 지나서까지도 그곳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승리하자 기념물로 이 돌을 강제로 가져갔다. 내용을 보면 일본과 하등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재도 일본에 남아 있지만 일반인의 접근은 어렵다.


   어쨌거나 이 돌에 새겨져 있는 작은 문구가 역사전쟁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은 놀라운 일이다.

          선로말갈사(宣勞靺羯使)

   말갈을 위무하는 사신이라는 뜻인데, 문제는 다름 아닌 ‘말갈’이라는 어휘에 있다. 당시의 당나라인은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인식하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이후로 고구려의 후예 국가로 인식해온 우리들의 상식과 배치되는 실물 증거이다.

 

   하지만 외부의 인식과 실체는 원래 다르기 마련이다. 예컨대 오늘날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부르는 동로마 제국도 사실 원래 시민들은 스스로 비잔티움이라고 부른 적 자체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 로마인이라고 불렀지만, 후대에 우리가 고대 로마와 구분짓기 위해 임의로 비잔티움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무엇이라고 불렀는지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사실 발해라는 이름은 (한국인들이라면 이 또한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중국 당나라에서 정해준 이름일 뿐이다. 마치 조선을 개국하던 당시 이성계가 명나라에 화령(和寧)과 조선(朝鮮) 중 국명을 택해달라고 요청하여 조선으로 결정되었던 사례와 유사하다. 이때 ‘발해’라는 이름을 가져간 사신이 바로 위의 돌에 글을 새긴 최흔이었다. 당나라 정부는 그를 통해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이자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처음 명명하였다. 이름 그대로 발해군의 군왕이자 홀한주의 도독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발해였을까? 이미 중국에는 오랫동안 황해 위의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의 작은 바다를 발해(渤海)라고 불러왔고, 여기에 접한 지역의 명칭도 옛날부터 발해군(渤海郡)이라고 해왔다. 《삼국지》에서 한때 원소(袁紹)의 직책명이 발해태수(渤海太守)였던 것도 그가 당시 발해군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발해 고(高)씨도 있었다. 우리가 아는 발해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심지어 고씨이지만 고구려와도 무관한 성씨이다. 산동성 발해군이 본관인 중국계 성씨라고 이해하면 된다. 오히려 대조영의 발해국이 발해라는 바다와 연관 있는 것이라고는 최흔의 돌이 있는 그곳처럼 발해만과 접해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이처럼 발해와는 별 상관도 없는 대조영의 신생국이 발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은 사실 우연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힌트는 발해군왕과 함께 주어진 홀한주도독에 나오는 ‘홀한(忽汗)’이라는 땅 이름에 있다. 실제로 대조영을 위시한 초기 발해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홀한이라고 불렀다. 고유명사였던 만큼 다른 뜻이 있을 지는 더 알 수 없지만 굳이 어원을 찾자면, 고구려어에서 ‘홀(忽)’은 ‘성(城)’의 뜻이고 ‘한(汗)’은 원래 북방지역에서 공통적으로 군장(‘칸’)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한자식으로 보면 성주(城主)쯤 될 텐데 꼭 그 뜻으로 발해인들이 사용하였다고 확언할 수는 없기에 참고만 하도록 하자.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해 배후에 있던 흑수말갈도 당나라에 외교활동을 벌였는데, 비슷하게 당나라는 그들에게도 흑수부(黑水府)라는 한자식 명칭과 함께 발리주(勃利州)로 지정해준다. 즉 뜻은 알 수 없지만 흑수인들이 스스로 ‘발리’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이제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대조영의 사신들이 당나라 조정에 들어가 외교활동을 벌였을 텐데, 당 정부는 외교관례상 그들에게 대조영 앞으로 당나라스러운 직책명을 정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무언가 이들의 현지어를 듣고는 그들에게 국명도 정해줄 겸하여 참고한 것이 바로 ‘홀한’이 아니었을까? 발해는 멸망 시까지도 수도의 이름을 홀한성(忽汗城)이라고 불렀고, 또 당시 사람들은 홀한인(忽汗之人)이라고 호칭하였다. 지금은 징포호(镜泊湖)라고 부르는 만주에 있는 호수는 원래 홀한해(忽汗海)라고 불렸었다. 흑수가 발리라고 호칭하였듯 발해는 홀한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던 것이 확실하다.

 

   당나라 정부는 대조영의 지역을 그들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 홀한주라고 인정하고 새로이 국가 명칭도 고민했을 것이다. 당시 대조영이 스스로 부른 국가 명칭은 진국(震國 또는 振國)이었는데, 아버지 걸걸중상을 무측천이 진국공(震國公)으로 불러준 것에서 기인하였던 것 같다. 즉 이를 보면 아직 스스로 명확히 국명을 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나라도 기꺼이 새로운 국명을 정해주기로 하였는데, 혹 중국의 전통대로 중원의 국가들만 한 자리 국명을 써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가칭으로 사용 중이던 진국 대신 고민 끝에 발해(渤海)라고 명명키로 결정하였다.

 

   발해는 중국식 발음으로 보하이(Bóhǎi)라고 읽는다. 중국인들이 듣기에 “홀한”과 “보하이”가 비슷한 데다가 마침 이들이 발해를 건너서 온 것도 연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당시 발해군(渤海郡)은 그 명칭이 창주(沧州)와 혼용되고 있던 와중이어서 비어 있는 이름을 내준다는 생각도 겸사겸사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정해진 이름을 발해인들은 아주 잘 활용한다. 건국 초기 진국이라고도 하다가 고구려라고도 하다가, 언젠가부터는 자연스럽게 ‘발해’ 하나로 통일이 된다. 이제는 발해인, 발해어 등 발해를 고유명사로 한 호칭들이 완전히 정착되는 것이다. 발해는 외국과의 외교에 있어서도 스스로 발해라는 국명을 사용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그들을 발해라고 부르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의 고유어인 홀한도 있었음을 기억해주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 참고자료 : 최흔 석각(일명 홍려정비), 신당서, 구당서, 고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