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또 다른 이름은 개금(蓋金)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이 고구려인의 발음을 듣고 그대로 기록한 것은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였다. 즉 소문=수미=금(金)이니 곧 고대한국어로 쇠라는 뜻을 한자로 써서 금이 되는 것이다.
그의 집안은 고구려 말에 소위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중리(中裏), 곧 중리위두대형(3품)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도 중리를 거쳐 막리지(2품)를, 그리고 아버지는 드디어 막리지에 대대로(1품)까지 고구려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아버지 사후에 젊은 연개소문은 정적들의 견제로 인해 대대로 직위를 승계하지 못하게 되자 이들에게 저자세로 읍소하면서 겨우 설득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앙심을 품고는 641년(중국측 역사서에는 642년)에 자신의 앞길을 훼방놓던 다른 부(部)의 대표자들과 대신들은 물론 같은 집안 출신에 심지어 당시 국왕까지 180여 명을 참살하는 쿠데타를 저질렀다.
그렇게 스스로 막리지로 취임한 그는 그 순간부터 무려 20여 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동시대 최고의 영웅이었던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李世民)조차 645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연개소문을 치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치욕적인 패퇴를 하고 만다. 이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당나라는 아들인 고종(高宗) 때까지도 줄곧 고구려를 괴롭혔지만,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패전만 거듭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고구려는 지킬 수 있었지만, 우회로를 모색한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고 660년 고구려 동맹의 가장 큰 한 축이었던 백제를 무너뜨림으로써 댐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연개소문이 특유의 외교력을 발휘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扶餘豊)과 왜의 대규모 지원군까지 끌어들여 백제부흥군으로 하여금 나당연합군과 대적하도록 하였으나, 663년에 백강(白江)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마지막 불씨도 꺼지고 만다.
가장 큰 문제는 연개소문 자신이었다. 시대의 영웅 연개소문도 결국 한 인간이었기에 육체적인 수명에는 그 끝이 존재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 정권 내에서 권력다툼이 발생한 탓에 668년 고구려는 마침내 그 긴 역사를 비극적으로 끝마치게 된다.

여기까지가 간략하게 살펴본 연개소문의 일생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별도로 한 권의 책이 필요하기에, 여기서는 주제를 한정해서 제목 그대로 연개소문의 생몰년에만 집중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는 정확히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은 것일까?
우선 오늘날처럼 주민등록과 같은 제도가 없던 시절이기에 그의 정확한 생몰년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유추를 할 만한 정보는 있다. 힌트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당서(唐書)≫
이보다 먼저 수나라 양제(煬帝)가 요동(즉 고구려)을 정벌할 때 양명(羊皿)이라는 비장(裨將)이 있었다. 전세가 불리하여 죽게 되자 이렇게 맹세하였다. “반드시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 연개소문의 개(盖)는 양(羊)과 명(皿) 두 글자를 합친 것이다.)
≪고려고기(高麗古記)≫
수나라 양제(煬帝)가 (612년)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왔다. (614년) 10월에 고구려왕이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몰래 작은 활을 가슴 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을 때 활을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군사를 돌이켜 세우려 하다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이때 우상(右相) 양명이 이렇게 답하였다. “제가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서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죽은 후 고구려에 태어나서 15세에 총명하고 무예도 뛰어났다. 그때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이름을 가지고 억지로 꿰어맞추는 등 사실일 수 없는 내용들이기에 있는 그대로 다 믿을 필요는 없다. 다만 내용상 그 시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당대에 이런 설화들이 유행했다는 것은 정말로 그 무렵에 연개소문이 태어났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 양제가 마지막 고구려 원정을 마치고 퇴각한 것은 614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정말 그때 614년에 태어났을까?
이는 몇 가지로 복수 검증을 해볼 수가 있다. 먼저 그의 첫째 아들은 634년생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지금보다 조혼이 일반적이었으니 스물 즈음에 처음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면 그가 614년생이라는 건 합리적인 추정이 된다.
또 그가 15세에 관직에 나아갔다는 소문은 어떨까? 이 또한 신빙성이 있다. 그의 아들들의 이력을 보면 두 아들의 경우 다 15세에 (중리)소형으로 임명되었음이 확인된다.
그가 막리지가 된 시점은 또 어떤가? 일본측 기록대로라면 그는 641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후 곧바로 막리지로 취임하는데, 이때는 그가 614년생이라면 28세의 일이 된다. 재밌는 것은 그의 장남 연남생도 28세에 막리지에 오른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기막히지 않는가?
연개소문의 후예들은 마치 짜놓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같은 나이에 같은 직급에 오르는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선인이라는 초급간부가 되는 것은 다들 아홉 살 어릴 때의 일이고, (중리)소형 다음으로 (중리)대형으로 진급하는 것은 또 18세 때 모두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중리)위두대형으로 오르는 것 역시 공히 23세 때이다.
추측컨대 연개소문 자신이 그런 인생경로를 살아왔기에 비슷하게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경력관리를 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부분이다. 더 이상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상의 정황을 종합해보면 연개소문은 614년생일 확률이 아주 높다.
그럼 그의 사망 시점은 어떻게 될까? 흥미로운 부분은 중국측 기록은 모두 666년의 일이라고 하고, 일본측 기록은 정확히 664년 10월을 가리킨다. 어느 것이 맞을까? 나는 일본측 기록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이렇다.
연개소문은 살아생전에 막리지와 태대대로라는 직위에 있었다. 뭐로 보나 고구려 정권에서의 최고 지위는 그의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의 장남이 태대막리지라고 하는 고구려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시점이 665년이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갑자기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게 아니라면, 아들이 최고위직에 오를 수밖에 없는 타당한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 중 가장 확실한 조건은 전임자의 사망일 테고 말이다.
《일본서기》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전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달(664년 10월)에 고구려의 대신 개금(蓋金, 즉 연개소문)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자식들에게 이렇게 유언하였다. “너희 형제들은 화합하기를 고기와 물과 같이 하고 관직을 다투지 말라.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웃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반면에 《구당서》나 《신당서》의 기록은 짤막하기 그지없다.
이 해(666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 연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측 기록은 연남생이 막리지로 취임한 이후 당나라에 그 사실을 전한 것이 그 시점에 기록으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측 기록은 사신이 와서 고구려 국내의 사정을 거의 실시간에 준하게 전한 것이기에 좀 더 정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여담이지만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아들 연남생이 24세에 막리지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657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원문을 제대로 구해서 읽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착오였다. 우선 24세에 그는 장군이 된 것이었고, 실제로 막리지가 되는 것은 661년의 일이다. 참고로 이 당시 막리지는 복수로 재임 가능하였기에 그가 완전히 후계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정식 후계자인 태대막리지가 되는 것은 앞서 본 것처럼 665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664년 10월에 사망하였고, 아마도 장례를 치른 후 준비 끝에 새해가 되어 장남 연남생이 후계자로서 등극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측에 이 사실을 전한 것은 고의적인 지연 내지 육로를 통한 사신 파견 등의 사유로 666년에 이뤄졌고, 그것을 소급하지 않고 단순히 그때의 일로 기록한 것이 중국의 역사서들이다.
연개소문은 오늘날 역사서들에서 말하듯 생년 미상에 666년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사실 614년에 태어나 641년에 28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32세 때인 645년에 당대의 영웅 이세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동북아에 명성을 떨친 후 664년 51세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뒤늦은 아쉬움이지만 그가 조금만 더 살아서 후계구도를 말끔히 정리를 해주었다면 고구려가 그의 죽음 이후로 고작 4년 만에 무너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고구려를 이끌고 세계 최강국 당나라에 맞서 이겨낸 영웅의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신당서, 일본서기, 연남산(淵男産) 묘지명, 연남생(淵男生) 묘지명, 연헌성(淵獻誠) 묘지명, 연개소문의 사년(死年)-신채호
[ 연남생(634~679) ]
나이가 겨우 9살에 곧 선인(先人)을 주었다. (중략) 나이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받았고,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 임명됐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고쳐 임용되었고, 24세에 장군(將軍)을 겸하여 받고 나머지 관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28세(661년)에 막리지(莫離支)에 임용되었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여 받았으며, 32세(665년)에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가 더해졌으니, 군사와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국왕을 보필하였다.
[ 연남산(淵男産, 639~701) ]
나이가 15세에 이르러서는 소형(小兄)의 지위를 내려줬고, 18세 때는 대형의 지위를 내려주었다. (중략) 나이 21살에 중리대활(中裏大活)이 더해졌고, 23세(661년)에 위두대형(位頭大兄)에 올랐다. 누차 옮겨 중군주활(中軍主活)이 되었고, 30세(668년)에는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가 되었으니… (후략)
[ 연헌성(淵獻誠, 651~692) ]
9살에 선인(仙人)의 직위에 임명되었고… (중략) 남산 등이 흉악한 짓을 저질렀을 때 공의 나이는 겨우 16세(666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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