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년 여름 6월, 당나라의 대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 고구려의 주요 성채를 차례차례 함락시킨 데 이어 이번에는 안시성(安市城) 북쪽까지 진군해왔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요동성에서 최대한 막아섰어야 했는데, 당 태종도 만만치 않은 영걸이었다. 수 양제가 눈물을 삼키고 회군해야 했던 요동성을 이번에 무너뜨린 것은 대고구려 전선에서 신의 한 수가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얻은 군량미 50만 석은 가볍게 출정해온 당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급해진 것은 고구려군이었다. 당초 안시성이 최전선이 될 가능성은 낮았기에 방비가 완벽하지 못한 것을 우려한 고구려는 총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15만 명이 넘는 대규모 지원군을 편성하여 급히 파병하였다.
당 태종은 고구려 지원군이 안시성과 긴밀히 연계하여 방어전에 나설 것을 가장 우려하였지만, 그에게는 매우 다행히도 고구려군은 통일된 지휘체계가 갖춰져 있지 못했다. 고구려군을 이끄는 이는 대대로 고정의(高正義)와 북부의 욕살 고연수(高延壽), 남부의 욕살 고혜진(高惠眞) 3인이었다. 참고로 욕살(褥薩)은 고구려어로 지방장관 겸 군지휘관을 뜻했다. 이들 중 고정의가 연장자에 경험도 많았지만, 문제는 각 지휘관들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나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싸우지 않고 계속해서 시간을 끌면서, 기습부대를 운용하여 그 보급로를 끊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오. 그렇게 보급이 떨어지면 싸우고자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여도 길이 없으니, 이것이 곧 우리가 이기는 방법이오.”
고정의가 제안한 전략은 고대 로마로 비유하자면 명장 한니발을 상대로 펼쳤던 파비우스의 지구전법(Fabian strategy)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휘하 장군들을 통제할 만한 권위가 부족했다. 이들은 안시성과 연계한 방어전략에는 의견이 일치해서인지 안시성에 접근하여 진영을 세우는 데에는 동의하였던 모양이지만, 자신들이 대군이라는 사실에 고무되어서 그런지 주전파로서의 성격을 벗어던지지는 못했다. 참고로 고구려군의 진영은 그 길이만 해도 15km 정도 되었는데, 이를 멀리서 본 당 태종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할 정도였다.
어쨌든 당 태종은 자신이 총사령관이었던 만큼 고구려군을 상대할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계획은 일종의 함정 전략이었다. 서쪽 산고개에 주력인 보병과 기병 부대를, 산 북쪽 협곡에 정예병사로 구성된 기습부대로 배치하고는, 자신은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잘 보이는 산 위로 올라갔다. 다음 날 당 태종의 부대가 규모가 적은 것을 본 고구려군은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그가 직접 미끼로 나선 것임을 고구려군은 이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듯하다. 하지만 측면에서 당의 주력부대가 장창으로 공격해오고 또 기습부대가 갑자기 후미를 급습해오자 고구려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승기를 탄 당군이 밀고들어왔고, 고구려군은 전사자만 해도 3만 명이나 되는 대패를 하였다.
고구려의 패잔병들은 물러나 산에 의지하여 급히 수비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당군이 퇴각로를 끊어버리고 포위해버렸다. 결국 버티지 못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6,800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이들 중 자신을 위험천만하게 공격해왔던 말갈군 3,300명만큼은 집단학살하는 것으로 당 태종은 분을 풀었다. 이때 당 태종이 올랐던 산은 승전을 기념하여 주필산(駐蹕山)으로 명명하였다. 황제가 머무른 산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후에 이 전투를 주필산 전투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遼陽)의 서남쪽에 있는 셔우샨(首山)이 그곳이라고 한다.
흥미로운것은 이때의 당군은 일종의 다국적군이었다는 사실이다. 항복한 돌궐인들을 위시하여 해(奚)와 거란과 같은 북방민족들은 물론, 한반도에서는 백제가 참전 대신 갑옷(명광개)을 보내왔고, 심지어 신라인도 당당히 원정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그중에는 오늘날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도 있다. 바로 설계두(薛罽頭)이다.
그는 신라 사회에서 좋은 집안 출신이라고 기록에는 나와 있지만, 예컨대 아찬(6등급) 설수진(薛秀眞), 나마(11등급) 설담날(薛談捺) 등 설씨 인물들의 당시 등급을 보면 6두품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6두품이라고 해서 결코 신라에서 낮은 골품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출신에 따른 사회적 성취의 상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능력 있는 이들로 하여금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루는 친구 네 명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했는데, 이때 설계두는 이렇게 포부를 밝혔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진다. 그에 소속되지 않으면 비록 뛰어난 재능과 공로가 있어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 나는 서쪽으로 중국에 가서 탁월한 지략을 떨치고 특별한 공적을 세우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높은 관직에 올라 고위관료의 복장을 갖춰 입고 황제의 곁에 다가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는 정말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인생의 도전에 나섰다. 621년에 신라와 당나라를 오가는 상선에 몸을 싣고 바다 건너 당나라로 과김히 밀항을 한 것이다. 그가 이후 당나라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전혀 정보가 없다. 그가 다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던 때이니 무려 24년 간이나 당나라에서 치열하게 살았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가 있을 듯하다.
그는 고구려 원정군에 자원하여 좌무위(左武衛, 호위부대)의 과의(果毅, 종5~6품)가 되었다. 스물 무렵에 인생의 도전을 하였다고 쳐도 이때면 이미 40대 중반은 족히 되었을 시점이었다. 대충 계산해봐도 당 태종과 동갑뻘이다. 오늘날에야 40대면 한창이라고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고령층에 접어들 나이였다. 그가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어쩌면 외국 땅에서의 마지막 몸부림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고구려의 요동땅까지 행군한 다음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 소속으로 고구려의 대군과 주필산 아래에서 맞서 싸웠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적진에서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전투 후 논공행상을 할 때 그는 공이 1등으로 평가받았다. 이에 당 태종이 물었다.
“이는 어떤 사람인가?”
“신라인 설계두입니다.”
신하들의 답에 그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주저하고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데, 외국인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으니 어떻게 그 공을 갚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서 설계두의 평생 소원이 무엇인지 듣고는 황제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의 시신 위에 덮어주었다. 또 사후이긴 하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예를 갖추어 정성껏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의 생전 소원대로 특별한 공적을 세우고 높은 관직에 오른 것은 물론 나아가 황제의 곁에서 황제의 옷까지 걸친 것이다. 그가 드디어 소원을 풀었다고 크게 만족했을지 아니면 죽은 다음이니 무슨 소용이겠냐고 한탄했을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이처럼 설계두가 활약하였던 것은 7세기 중엽이었지만, 신라 사회의 고질적 병폐는 끝내 고쳐질 기미가 없었다. 천년왕국 신라도 어느덧 그 끝이 보이던 10세기 초까지도 이 문제는 결국 해결되지 못하였기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후삼국의 새로운 국가들이 낡은 신라를 해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중국 당나라에 유학 가서 성공하고 고국에 돌아온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결국 신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크게 실망하여 낙향하였던 사례를 떠올려보자. 그는 그나마 끝까지 신라에 머물렀지만, 수많은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인사들은 신라를 떠나 각자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설계두는 비록 타국의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두 세기도 더 지나서야 한반도에서는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뿌리깊은 골품제가 타파될 수 있었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보장왕 본기〉 및 〈설계두 열전〉,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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