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읽다보면 간혹 무언가 생소하면서도 어색하면서 한편으로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좀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처음 《삼국유사》를 읽을 때였다. 첫 시작부터 고조선을 위시하여 부여, 고구려, 발해, 가야 등 대충 이름이라도 들어봤던 어느 정도 친숙한 고유명사들이 쭉 등장하니 그렇구나 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나라 이름이 나타났는데 이건 뭘까 싶었던 기억이 있다. 바로 이서국(伊西國)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때는 그저 신기했던 느낌을 가지고 넘어갔었는데 이후에도 종종 다시 읽게 될 때마다 그 이름을 마주치는 순간, 도대체 여긴 왜 다른 나름 유명한 국가들 사이에서 마치 동급처럼 한 꼭지 기록으로 남아는 있으면서 자세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을까 싶어 살짝은 답답했던 마음이 줄곧 있었다. 기껏해야 마한, 진한, 변한의 수십 개 소국들 중의 하나였을 거라는 설이 대충 주석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이상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설명은 물론 그 이후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는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동시대 무렵을 다룬 정사 《삼국지》의 〈동이전〉과 비교해서 읽을 일이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 간단히 아래와 같이 소제목으로 나오는 국가의 명칭들을 비교해보았다.
| 《삼국지》〈동이전〉 | 《삼국유사》 제1기이 |
| 부여 | 북부여, 동부여 |
| 고구려 | 고구려 |
| 동옥저, 읍루 | 말갈, 발해 |
| 예 | - |
| 한 | 고조선, 마한, 72국, 가야, 변한, 백제, 진한 |
| - | 이서국 |
다시 한 번 느꼈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간혹 전설이나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이 《삼국유사》에 많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심지어 역사기록상의 괴력난신(怪力亂神)은 기를 쓰고 피하려고 했던 《삼국사기》에서조차 이서국은 실제로 한 줄이나마 남아 있으니 이서국이 허황된 존재는 아닐 거라는 작은 믿음 정도는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좀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서국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기록은 다음이 전부이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제3대 노례왕(弩禮王) 14년(37년) : 이서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 신라의 수도 궁성)을 공격했다. (지금의 청도(淸道) 땅이 곧 옛날 이서군이다.)
건호(建虎) 18년(42년?) : 이서국을 정벌해 멸하였고, 이 해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침범하였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 대 : 이서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다. 우리가 크게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병사가 있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대나무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병사와 힘을 합쳐 적병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이들이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선왕에 의한 음덕의 공이 있었음을 알았는데, 이로 인하여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14년(297년) : 옛 이서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우리나라가 많은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때 신비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고 모두 대나무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해 물리쳤는데, 그 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대나무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이 목격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선왕이 음병(陰兵)을 보내 싸움을 도와준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삼국사기의 기사는 삼국유사의 마지막 기사와 사실상 판박이이다. 그나마 차이라면 그냥 동시대의 이서국인지 혹은 옛날의 이서국인지 정도의 표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선 만약에 기록을 그대로 신뢰해서 발생한 일들의 순서를 정리해보면 다음처럼 이상한 일이 생기게 된다.
37년 : 이서국의 신라 금성 공격
42년 : 이서국 정벌 멸망
297년 : 옛 이서국에서 신라 금성을 공격
여기서 이서국의 멸망 시점을 서기 42년으로 본 것은 건호(建虎)라는 연호가 역사상 없기에 역대 국왕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사용할 경우 피휘(避諱)하는 관습을 참고하여 건무(建武) 18년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어쨌든 이미 오래 전 멸망한 나라가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역사상 이렇게 멸망한 것을 보이는 국가가 다시 등장하는 사례는 간혹 있긴 있다. 재밌는 것은 시점조차 이서국과 비슷한 그러한 나라가 하나 있다. 바로 옥저(沃沮)이다.
동명성왕 10년(기원전 28년)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태조 4년(56년)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동천왕 20년(246년) 겨울 10월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군을 거느리고 침략해와서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탈출하여 달아나자 장군 왕기(王頎)가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고자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정리해보자면, 기원 전후한 시점에 옥저의 각 지역들은 한창 신흥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고구려로 흡수가 되고 있었고, 아마도 옥저도 그 사이에 생존을 위해 도미노처럼 남쪽으로 신라까지 연쇄 공격을 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도 반격을 가하여 42년경 옥저의 남단쯤 되는 이서국을 쳤는데, 마침 고구려가 동시간대에 신라를 공격해왔다는 것은 서로 옥저 지역을 두고 분쟁을 벌인 상황이 기록으로 남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옥저는 결국 고구려의 피지배국 처지로 전락하긴 하였으나 완전히 흡수합병된 것은 아니었던 듯, 여전히 2백 년이 지나도록 그 이름과 명맥만큼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246년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때인데, 위나라 원정군측은 흥미롭게도 고구려를 지나 옥저땅까지 진격하면서 각지의 인터뷰 기록들을 남겼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삼국지》〈동이전〉에 담겨 있다. 이때까지도 북옥저와 동옥저는 명목상이나마 존속해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남옥저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대신 우연찮게도 예(濊) 혹은 예맥(濊貊)이라고 표현된 존재가 등장한다. 원래의 예는 광의의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아마도 남옥저를 다르게 부른 명칭인 것으로 보이는데, 위치도 남북으로 진한(辰韓)과 옥저 사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추정해볼 수가 있다. 더욱이 이들은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말하는데, 옥저도 대체로 고구려와 언어부터 생활양식까지 비슷하다고 하였던 것을 참고하면 이 둘이 별개는 아니었던 듯하다. 마침 《삼국지》〈동이전〉에 예는 나오지만 《삼국유사》에는 예가 없다. 거꾸로 이서국이 《삼국유사》에만 나오듯이 말이다. 이 둘은 사실상 같은 존재를 다르게 표현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해왔을 때 동천왕이 처음 피신을 떠난 곳도 남옥저였다. 인종적이든 문화적이든 고구려에 복속된 땅이었기에 자국의 영토로서 안전을 찾아 피신을 할 생각을 하였던 것이리라.

그럼 왜 이서국이라는 이름이었을까? 고유명사에 “왜”를 질문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어려운 일이긴 하다. 우리도 자신의 이름에 뜻을 떠올리면서 항시 살아가고 있지는 않기에 어느 순간 본뜻보다는 발음으로만 남고 그렇게 불리는 게 당연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시도는 해보자.
이서국의 한자를 우리말로 그대로 풀어보자면 저(伊) 서쪽(西) 나라(國)라는 매우 단순한 뜻이다. 저 서쪽? 왠지 어색하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보자. 서쪽은 신라에서 남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해당된다. 오른쪽의 저기 있는 나라, 곧 앞의 한 글자씩 따서 본다면 “오ㄹ-저”가 될 텐데, 그런 비슷한 발음의 나라가 있었던가? 맞다. 바로 “옥저”이다. 참고로 옥저의 오늘날 중국어 발음은 “워쥐(Wòjǔ)”인데, 한자의 뜻보다는 그 당시의 발음을 기준으로 한자 명칭이 정해진 사례일 것이다.
장난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신라어는 지금의 일본어가 한자를 음독(音讀)과 훈독(訓讀) 두 종류로 읽듯이 그 뜻을 음 그대로 한자로 옮겨쓰거나 그 뜻대로 한자를 선택하는 두 가지 기재법을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거칠부(居柒夫)라는 인물은 황종(荒宗)이라고도 적었는데, 전자는 신라식 발음대로 한자를 매칭해서 쓴 것이고 후자는 음이 아닌 뜻으로 한자를 골라쓴 경우이다. 거칠 황(荒)에 마루 종(宗)인데, 종의 경우엔 일본어 훈독 시 우두머리, 으뜸, 1인자라는 의미의 무네(むね)라고도 읽듯이 ‘부’와 그대로 통한다.
신라인들은 아마도 “옥저”라는 발음을 듣고 음이 아닌 뜻으로 읽어 “오ㄹ-저” 즉 한자식 표기로 “이서(伊西)”라고 적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론이긴 하지만 우연찮게도 이서국은 신라의 서쪽에 있었으니 방향과 발음이 일치하게 되니까 말이다.
다시 한번 일본어를 참고해보자면, 일본어에서 서쪽은 니시(にし)이고 동쪽은 히가시(ひがし)라고 하는데, 신기한 것은 왼쪽은 히다리(ひだり), 오른쪽은 미기(みぎ)가 된다. 동쪽이 왼쪽과 발음이 비슷하고, 또 서쪽이 오른쪽과 발음이 비슷해지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남향으로 섰을 때 바라보이는 오른쪽(미기)이 서쪽(니시)이 되고, 왼쪽(히다리)이 동쪽(히가시)이 되기 때문이다.
| 왼쪽 | 오른쪽 |
| 히다리(ひだり) | 미기(みぎ) |
| 히가시(ひがし) | 니시(にし) |
| 동쪽 | 서쪽 |
이처럼 왼쪽, 오른쪽을 각각 서쪽, 동쪽의 방향으로 매칭하여 사용하는 방식이 고대 신라에서도 당연히 통용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초 이순신이 담당하였던 전라좌수영도 한양에서 남쪽을 바라봤을 때 왼쪽인 전라도의 동부지역에 있었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저 서쪽 나라라는 뜻의 이서국도 이와 같이 읽어보면 오른쪽, 즉 옥저를 훈독으로 한자식으로 표현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옥저는 하나의 나라는 사실 아니었던 게, 그 당시의 기록만 해도 이미 북옥적, 동옥저, 남옥저 등 지역별로 구분하여 표현이 되고 있다.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고대의 자료도 부족하고 턱없이 부족하고 특히나 고고학적 유물로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상 없다보니 특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동옥저가 대략 4백 km 가량 오른쪽으로 길게 기울어진 지형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대략 옥저 전체는 한반도 동부 지역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쭉 길게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최남단 끝자락에 위치한 남옥저 혹은 그곳 일부가 신라의 수도 서쪽(오른쪽) 어딘가까지 닿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남옥저와 신라가 지근거리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혁거세 53년(기원전 5년)에는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 20필을 선물하였다.
온조왕 42년(24년)에는 남옥저의 20여 가호가 신라로 귀순해왔다.
온조왕 43년(25년) 겨울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호가 부양(斧壤)으로 와서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온조왕 대의 기록 두 가지는 목적지가 신라인지 부양인지 모호하지만 문맥상 백제쪽 기록이었던 만큼 부양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쪽이든 신라 영토와 가까운 지역까지 옥저가 뻗어 있었음은 최소한 확인이 된다. 또한 남옥저도 아니고 동옥저에서도 신라에 사신 파견을 할 만큼의 물리적 거리는 되었으니 말이다.
정리해보자. 이서국은 옥저의 한자식 표현으로, 남옥저 혹은 예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수도에서 서쪽으로 오늘날 경북 청도(淸道)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것 같다. 아마도 고구려의 정복에 따른 여파로 신라 인근까지 일부 세력이 남하했던 모양인데 이를 통해 한 차례 신라와 분쟁을 겪었고, 나중에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이후 언젠가 연쇄이동의 영향으로 2차 분쟁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전통적으로 역사학에서는 함부로 상상하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딱딱한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아니기에 그저 역사의 숨겨져 있던 이면을 추적해나가보고자 하는 작은 시도로 이해해주시길 당부드린다. 그리고 솔직히 상상하지 않는 역사는 재미가 없기도 하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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