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평강공주는 평강공주가 아니다!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1. 28. 15:21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화책, 그림책, 소설책, 심지어 에세이로까지 이미 수십 종이 출간되어 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 동화같은 이야기는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사실이며, 여러 가지 당시 사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글이기도 하다. 다만 그 원전을 자세히 읽어볼 일은 많이들 없었을 테고, 특히나 평강공주가 과연 왜 평강공주였는지 의문을 가져본 사람은 더욱 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원전을 토대로 주인공인 평강공주의 잘못 알려진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보도록 하겠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의 사람이었다. 외모는 못 생겨서 남들의 웃음을 샀지만, 마음만은 정말 착한 친구였다. 너무 가난해서 항상 음식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다 해진 신발을 신고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자주 왔다갔다하다보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고는 ‘바보 온달(愚溫達)’이라고 불렀다. 나름 그는 고구려 사회에서 (좋은 의미는 아니었지만) 유명인사였던 셈이다. 얼마나 바보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던지 심지어 당시 왕마저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딸이 어려서부터 울보여서 종종 평강왕은 이렇게 놀리곤 하였다.
   “네가 너무 울어서 내 귀가 다 아프구나. 어른이 되면 사대부의 아내가 되기는 글렀고, 그냥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야겠다.”
   평강왕은 딸이 16세가 되자 상부(上部)의 고(高)씨 집안과 혼인을 시키려고 하였다. 왕가의 성씨인 고씨였던 것을 보면 아마도 같은 왕족이었거나 방계 혈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공주가 당돌하게 대꾸하였다.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꼭 온달의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그 말씀을 번복하려 하십니까? 평범한 사람도 실언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대왕께서는 어떻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은 실없는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네가 감히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면 너는 내 딸이 아니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네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오늘날로 치면 사춘기 딸의 반항에 평강왕은 노발대발했다.

 

   이에 공주는 값비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서 홀로 궁을 나왔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온달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집에 도착하여 나이든 시각장애인 어머니가 계신 것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면서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또한 미천하니 귀한 분께서 가까이 할 사람이 못됩니다. 그런데 당신의 향기를 맡아보니 범상치가 않고, 또 손을 만져보니 부드러운 것이 마치 솜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천하의 귀한 분이실 텐데, 누구의 속임수에 빠져서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까? 아마도 내 자식은 배고파서 산과 숲으로 나무껍질이라도 주우러 간 것 같은데,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공주는 집에서 나와서 산 아래로 갔다. 나무껍질을 메고 오고 있는 온달을 보고는 공주는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은 얼굴빛을 바꾸며 이렇게 말하고는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다.
   “이는 어린 여자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니, 분명히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이겠구나.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공주는 외로이 돌아와서는 사립문 아래에서 묵었다. 아침이 밝자 다시 집으로 들어가 온달과 그 어머니에게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 어머니가 대신 완곡하게 말하였다.
   “제 자식은 미천하여 귀하신 분의 배우자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저희 집은 찢어지듯 가난하기에 귀하신 분이 계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
   “옛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이라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라도 꿰맬 수 있다’(一尺布尙可縫 一斗粟尙可舂 兄弟二人不能相容)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꼭 부귀해진 이후라야 가능하겠습니까?”
   공주의 대답을 보면 그녀의 높은 학식을 짐작할 수 있는데, 참고로 이때 인용한 말은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史記)의 한 문구이다.
   이에 가져온 값비싼 팔찌를 팔고 농지와 집, 노비 및 소와 말 그리고 그릇 등을 구입하여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갖추었다.
   처음 말을 살 적에 공주가 온달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시장 상인들의 말을 사지 말고, 반드시 국가 소유의 말들(國馬) 중에서 병들고 쇠약해 내놓은 말을 골라서 사오세요.”
   착한 온달은 그 말대로 하였고, 공주는 열심히 사온 말을 길렀다. 말은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아무래도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朱蒙)의 말 키우기 일화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부분이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자 왕이 사냥을 나갔고, 여러 신료와 5부(部)의 병사가 모두 따라나섰다. 이때 온달도 그동안 기른 말을 타고 참가하였다.
   온달은 말을 타고 달리는 데 항상 앞에 있었고, 사냥으로 잡은 동물 또한 많아서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와 이름을 묻고는 그가 온달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으로 또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遼東)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肄山)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이때 온달이 선봉이 되었는데, 전력을 다해 싸워서 격살한 것이 수십 명이었다. 이긴 틈을 타서 많은 군사가 맹렬히 공격해서 크게 이겼다.
   전후에 전공을 평가하게 되자 모두가 온달을 일등공신으로 추천하였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며 “이 사람이 내 사위다!”라고 말하였다. 예의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관직을 주고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당시 고구려 관직의 등급으로는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대형(大兄)·소형(小兄)·의후사(意侯奢)·오졸(烏拙)·태대사자(太大使者)·대사자(大使者)·소사자(小使者)·욕사(褥奢)·예속(翳屬)·선인(仙人)의 모두 12등급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형이면 이중 3등급에 해당되니 벼락출세에 해당되는 셈이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온달을 제대로 한 사람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낸 공주의 노력이 있었다.
   이로써 온달은 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가 날로 더해갔고, 위엄과 권세 또한 나날이 높아졌다.

   어느덧 평강왕이 세상을 떠나고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왕께 아뢰었다.
   “일전에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지역을 빼앗아 가져갔으니, 그곳 백성들은 몹시 가슴 아파하며 지금껏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그저 어리석다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군대를 주신다면 한 번 가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여기서 신라가 고구려 땅을 침탈해간 것은 551년 제24대 진흥왕(眞興王) 때 거칠부(居柒夫, 502~579)가 여덟 장군을 거느리고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백제가 평양을 공격하는 사이에 신라측에서는 죽령(竹嶺, 충북 단양) 서북쪽부터 고현(高峴, 북한 강원도 철령)까지 고구려 영토였던 10군(郡)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양강왕이 전쟁을 승인하였다. 온달은 출정하기에 앞서 맹세하였다.
   “계립현(鷄立峴,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 사이)과 죽령의 서쪽 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드디어 출진하여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는데, 온달은 화살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여기서 아단성의 위치는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고 있는데, 크게는 서울시 광진구의 아차산성(峨嵯山城)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溫達山城) 두 가지 설이 대립중이라는 사실을 기록해둔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 - 국가유산청
< 단양 온달산성 성벽 - 국가유산청 >


   이후 온달의 시신을 본국으로 데려와 장사 지내고자 하였지만, 그의 시신이 담긴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죽음과 삶이 결정되었습니다. 돌아가시지요!”
   그러자 드디어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하였다.


 

   여기까지가 《삼국사기》의 〈온달 열전〉을 중심으로 재현해본 평강공주 스토리이다. 백제에 서동과 선화공주가 있다면 고구려에는 온달과 평강공주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두 스토리의 차이점이라면 백제의 경우엔 서동의 적극적인 구애 끝에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고구려에서는 평강공주가 온달을 각성시키는 능동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정도겠다.
   재밌는 것은 오늘날 심리학 용어로까지 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름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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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제 와서 오랜 시간 동안 당연하게 알고 있던 “평강공주”라는 이름이 사실은 잘못된 호칭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듯하다. 그녀의 존재가 등장하는 곳은 《삼국사기》의 〈온달 열전〉이 전부이다. 심지어 그 열전 안에서도 그녀를 부르는 이름은 “평강공주”가 아니다. 사실 역사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름 없이 단순히 “공주(公主)”라고 지칭되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는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후대에 누군가가 임의로 그녀를 “평강공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마치 그것이 실제 그녀의 이름인 양 전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평강공주”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그 연원은 사실 꽤나 단순하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温逹高句麗平岡王時人也)
          평강왕의 어린 딸 (平岡王少女) …

   이렇듯 온달과 결혼하게 된 공주가 곧 평강왕의 딸이어서 그냥 임의적으로 평강왕의 공주, 곧 평강공주로 지칭하게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평강왕(平岡王)이 누구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고구려의 제25대 평원왕(平原王)을 평강왕이라고 보아왔다. 같은 평(平)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별칭인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는 호칭에서는 아예 평강(平崗)이라는 같은 한자가 실제로 사용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봐서는 아무런 이슈도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삼국사기》〈온달 열전〉에 따르면 평강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이는 양강왕(陽岡王)인데,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서는 제26대 영양왕(嬰陽王)이 차기 국왕으로 나온다. 오히려 그 앞 순번인 제24대 양원왕(陽原王)의 별칭이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으로 양강왕이라는 이름에 그대로 매칭이 된다는 게 이상한 부분이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온달 열전〉 평강왕 → 양강왕
           〈고구려 본기〉 양원왕 → 평원왕

   타임머신으로 두 왕이 서로 번갈아 태어난 시기가 뒤바뀔 수는 없을 테니, 분명 두 기록 중 하나는 잘못된 게 맞을 것이다. 그럼 무언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여기에 각 왕들의 본명을 추가해보자.

 

국왕 대수 재위 기간 시호 별칭 본명
24 545~559 양원왕(陽原王)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고평성(高平成)
25 559~590 평원왕(平原王)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고양성(高陽成)
26 590~618 영양왕(嬰陽王) 평양왕(平陽王) 고(대)원(高(大)元)


   느낌이 오는가? 바로 양원왕의 이름에는 “평(平)”이 들어가고, 거꾸로 평원왕의 이름에는 “양(陽)”이 들어가는 일종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다.
   참고로 이들의 이름에 쓰인 ‘강(岡,崗)’은 언덕 또는 구릉(丘陵)의 뜻을 가진 한자이고, ‘성(成)’은 말 그대로 성채를 의미하니 이 둘은 그냥 봐서는 서로 달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어를 알면 상황은 달라진다.

          ‘구루’란 고구려인들이 성(城)을 부르는 말이다. (溝漊者, 句麗名城也.)

   ‘구릉’이 고구려어로 ‘구루’, 곧 성(城)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강왕은 즉 (고)평성 왕과 같은 말이 되고 또 다음 왕인 양강왕도 (고)양성 왕과 같은 뜻이 되니 《삼국사기》의 순서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진다. 즉 이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놓고 다시 보자면 다음의 순서가 맞게 된다.

          평강왕 (= (고)평성 왕) → 양강왕 (= (고)양성 왕)

   결국 평강공주는 그간 잘못 알려졌던 것처럼 제25대 평원왕의 딸이 아니라 사실 그 앞의 제24대 양원왕 고평성의 딸이었던 것이다.

 

   시점으로 봐도 이는 타당해 보인다. 평강왕 사후 양강왕 때 온달이 앞서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자고 제안하였을 때, 신라의 영토 탈취가 있었던 해가 551년이었으므로 이는 제24대 양원왕 고평성(재위 545~559) 때의 일이 맞다. 즉 양원왕 사후 제25대 평원왕 고양성이 559년에 즉위하였기에 불과 8년 전의 패전에 대해 온달이 복수를 주장하는 것이 시간흐름상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전통적인 해석대로 제25대 평원왕이 평강왕이라고 한다면 이때 온달이 제안하는 신라 공격은 무려 40년이나 지나서야 반격에 나선 셈이어서 너무 오래 전 일을 복수한다는 시차상의 문제점이 생긴다.


   또 온달이 후주 무제의 침공을 저지하였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우선 후주(後周, 951~960)라는 나라 자체는 10세기에 존재했기에 이때의 후주는 당시 남북조시대였던 중국의 여러 나라 중에서 북주(北周, 557~581)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본다. 하지만 북주는 중원에서도 내륙지방에 있었다보니 중간에 다른 적국까지 통과하면서까지 동북방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러 올 수 없다는 지리적 문제가 있다. 당시 고구려와 인접해 있던 다른 남북조시대 국가는 동위(東魏, 534~550)를 이은 북제(北齊, 550~577) 하나뿐이었다. 즉 후주는 북제의 오기라고 보는 것이 옳다. 여기서 그럼 시점을 특정하기 위해 고구려 침공을 지휘했다는 무제의 재위 시기만 확인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제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동위의 승상이었던 고환(高歡, 496~547)이 북제의 (신)무제(神武帝)로 추존된 인물이기에 (기록이 유실되어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던 주체였을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차남인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 재위 550~559)이 사실상 북제를 세운 인물이기에 그를 건국시조라는 의미로서 무제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능 이름도 무령릉(武寧陵)으로 무제와 같은 무(武)자를 쓰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문선제 치세 초기인 552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해서 동위 때 고구려로 이주해간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되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고구려와의 군사적 마찰의 배경이 그 사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평강공주는 이름도 평강이 아니었지만 결정적으로 평강왕의 딸도 아니었다. 그녀는 제24대 양원왕 고평성의 공주였다. 그녀의 고집스런 의지가 있었기에 고구려는 온달이라는 숨어 있던 영웅을 발굴할 수가 있었고, 또 그녀의 적극적인 활약이 기록으로 남은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그 당시의 고구려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가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녀와 그녀의 남편 온달에게 역사에서의 올바른 위치를 찾아줄 때일 것이다.


# 참고 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북사(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