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을파소와 복지국가 고구려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1. 27. 10:00

  고구려인 을파소(乙巴素)는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다만 제2대 유리왕(琉璃王) 때의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신분제 질서에 기반하고 있던 고대사회에서 대신의 자손이라면 상당한 귀족 집안이었을 텐데, 어떤 일로 인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가문이 몰락한 때문인지 을파소는 서압록곡(西鴨淥谷)의 좌물촌(左勿村)이라는 해안가에 가까운 지역에서 농사 지으며 살고 있었다. 아마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그는 고구려 사회에서 다시 상층부로 진입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이다.

  서기 190년 음력 9월의 가을 날씨가 완연한 어느 날,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주축이 된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왕가의 외척들로 권력을 쥐락펴락 하였는데, 부패한 행실로 인해 그간 나랏사람들의 불평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고구려의 제12대 왕인 고남무(高男武)도 늦었지만 이와 같은 외척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고 마침내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사전에 알아챈 좌가려 일당이 이판사판이라 생각했는지 오히려 선수를 쳐서 모반을 결행하였다. 이들은 세력을 모아 먼저 왕도를 공격하였고, 이에 놀란 왕도 급히 수도 근방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반란 진압에만 수개월이 걸릴 정도로 공방전은 치열했다.

  해가 바뀌어 서기 191년 음력 4월 여름 무렵에 왕은 반란자들을 사형시키거나 귀양보내는 등 겨우 사후 처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반란 진압으로 제대로 고생을 한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의 원인은 국가 지도체계의 구조적 문제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간 총애에 따라 관직을 부여하고 능력이 없어도 직위를 올려주니, 그 폐해가 국민에게도 미치고 왕가 역시 피해를 입게 되었소. 이는 내가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이제 각 4부(部)는 그 동안 발탁되지 않은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골라 추천하도록 하시오.”

  아마도 왕은 아버지 신대왕 치세하의 명재상 명림답부(明臨答夫)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왕이 태자로 지명받기도 전에 연나부(椽那部) 출신 명림답부가 국상(國相)에 취임하여 고구려가 처한 국난을 어떻게 현명하게 헤쳐나가는지 직접 겪어봤기에 다시 한번 선대에 성공했던 방식을 도입해보고자 하였던 것일 수 있다. 다만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짐작컨대 신대왕의 경우 명림답부의 쿠데타 덕분에 왕위에 등극한 만큼 조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대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왕도 잘 알기에 그런 상황이 자신에게도 반복될까 우려하여서 굳이 피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이미 다른 외척이나 대신들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처지였기에 모 아니면 도의 심정으로 한번 크게 베팅을 해본 것일 수 있다. 더욱이 이번에는 기존 기득권세력 내에서가 아닌 그럴 만한 배경이 약한 혹은 아예 없는 인물을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 발탁하는 경우라면 상황에 대한 주도권은 왕 본인이 쥐고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일부러 굳이 가장 낮은 곳부터 적절한 인물을 찾아보려고 하였던 것 같다.

  얼마 후 4부가 논의 끝에 뜻을 합하여 공동으로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추천하였다. 왕이 그 추천을 받아들여 곧 그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고 하였는데, 왕 앞에 나온 안류가 부득불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점도 없고 재능도 없어서 아무래도 국가의 정치를 담당하기에는 부적합할 듯합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란 이가 있는데, 유리왕 때의 대신(大臣) 을소의 후손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아직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고 직접 농사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국가를 제대로 이끌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압록강변계도(조선시대) - 국립중앙박물관


  이 말을 들은 왕은 안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따로 을파수에게 사신을 보내 예의를 갖추어 겸손한 말로 그를 궁궐에 초빙하였다. 이에 을파소도 왕명에 따라 왕을 찾아왔다. 왕은 그를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우태(于台)까지 겸하여 임명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는 어쩌다 왕위를 이어받아 국민의 위에 있게 되었지만, 수양이 부족하고 능력이 출중하지 못해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소. 선생은 능력과 지혜가 있음에도 이를 감추고 일부러 외진 곳에 계신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나를 저버리지 않고 바로 와주시니 비단 나만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와 모든 국민의 복일 것이오. 부탁컨대 좋은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은 진심을 다해 도와주시기 바라오.” 

  을파소는 부름을 받고 나오면서 이미 마음 속으로는 국가를 위해 한번 열심히 일해볼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설명을 들어보니 부여받게 될 관직이 뜻한 바를 제대로 추진하기에는 권한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절대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본심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오늘 처음 본 사이이지 않은가. 완곡히 왕의 속마음을 떠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는 재능이 부족하고 둔해서 감히 지엄한 왕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시어 큰 성과를 이루시는 게 좋겠습니다.” 

  두뇌회전이 빠른 왕은 즉각 을파소의 숨은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마 다른 일반적인 권력자였다면 자신이 무명의 인물을 발탁해주겠다는데 은혜도 모르고 감히 더 높은 자리를 달라고 조르는 셈이니 화를 못참고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 왕은 확실히 그릇이 달랐다. 그는 다시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최고위직인 국상(國相)으로 격상하여 국정을 일임하겠다고 답변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추진하였다. 조선시대의 역사가인 안정복의 말마따나, 유방이 장량을 얻고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사회의 변혁이 요구되는 시기에 배포 있는 신하와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군주의 유기적인 공조체제가 결성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의 대신들과 왕가의 친인척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미 안정적으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같은 동지나 마찬가지였던 좌가려의 반란으로 조정에서의 입지가 잔뜩 위축된 마당에, 듣도 보도 못하던 자가 나타나 갑자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니 기분 좋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이들은 을파소가 분명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이권을 침범할 것이라고 보고 그를 하나같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을파소는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음양으로 온갖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엔 조정의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던 왕은 시의적절하게 교서(敎書)를 내려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출신을 불문하고 국상 을파소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내가 직접 그 일족을 멸해버리겠소!”

  왕의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발탁인사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에 대신과 친인척들만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 감정은 다르지만 을파소도 마찬가지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도 긴가민가 했을 정도로 기대 이상의 믿음을 보여준 왕에게 그 역시 감명받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솔직히 이와 같은 소회를 밝혔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둔하고,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가는 것이 선비의 당연한 도리인데, 지금 대왕께서 나를 깊은 뜻으로 대우해주시니 어떻게 옛날로 돌아가 은둔할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조정 내의 기득권 세력들로부터 갖은 훼방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개혁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더욱 다졌다. 이렇듯 국정을 수행함에 있어 올바른 정치와 교육에 힘쓰고 법 집행에 있어서도 객관적으로 신중하게 처리하니, 국민들이 마음을 놓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면서 온 나라가 평화를 찾았다. 왕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국상 을파소에 대한 신뢰와 존경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마치 고려시대 공민왕과 신돈의 만남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시작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끝내 변심하여 신돈을 내쳐러버리고마는 공민왕과 분명 달랐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겨울에 접어든 10월 어느날, 왕은 처음에 개혁가로 발탁하려고 검토했던 안류를 불러들였다.

  “만일 그대의 말 한 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을파소를 등용하지 못했을 것이니, 지금의 이 많은 공적은 결국 그대의 공이라 할 수 있겠소.”

  그렇게 치하하며 안류를 대사자(大使者)로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왕의 언급은 사실 안류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전해들을 을파소에게 주는 자극이기도 했다. 이 정도 기대와 관심을 받을 정도면 얼마나 더 정진하라는 뜻이었겠는가. 말 그대로 분골쇄신하는 것 외에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힘들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후대의 김부식은 이 일을 두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옛날 현명한 군주는 현명한 이를 만나면 그를 등용하는 데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일단 등용하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지만 현명한 사람이 적절한 위치에 앉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에 걸맞는 직책을 맡아 정치가 잘 이루어지고 국정 운영이 원활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국천왕이 직접 결단을 내려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여 주위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이 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백관의 위에 자리하게 하였으며, 또 그를 천거한 안류에게도 상을 주었으니 옛날 현명한 군주들의 방법을 정확히 이행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 성호 이익도 이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당장 재야에 있는 선비를 갑자기 조정에 불리 올리면 실패하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고로 현명한 임금이라면 어진 신하를 대우하는 데 있어 작은 허물로 큰 뜻을 방해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지껄이는 것에 현혹되어 원대한 계획을 훼방놓지 않음으로써 좋은 성과를 기대해볼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상 유일하게 그런 사람을 얻은 바 있으니 바로 을파소가 그였다.

  그리고 3년이 더 흘러 이제 왕의 재위 16년차에 접어든 서기 194년 음력 7월 가을,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으로 인해 추수를 해야 할 곡식이 많이 죽어버리는 재해가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속절없이 굶주리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서 정부에서는 곡식을 보관중인 창고를 열어 긴급구제토록 하였다.

  사실 이는 근본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의 응급조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이 정도의 빈민층 구제정책은 어느 나라나 있어왔다. 다만 제도화되어 있지 않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구휼하는 형태로 비상시적으로 가동되어 왔을 뿐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당장 굶게 생긴 국민들에게는 어느 정도 도움은 되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함을 누군가는 느끼고 있었다.

  그해 겨울로 접어들면서 이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0월에 우연히 왕이 질양(質陽)이란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가에서 앉아 울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무슨 일로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인지를 물으니, 그는 이와 같이 울먹이며 대답하였다.

  “저는 워낙에 가난해서 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모셔왔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품을 팔 곳조차 없어 약간의 곡식도 얻을 수 없기에 그저 울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즉시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면서 위로하였으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 내가 책임져야 할 국민들을 이 지경에 처하도록 방치한 것이니 이건 나의 잘못이로구나.”

  왕은 마음 속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궁에 돌아와 곧 담당 관청에 지시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그외에도 병들고 가난하여 자립할 수 사람들을 널리 찾아 구제하도록 하였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빈민구호였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제도적으로 사회안전망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물론 왕이 직접 세부사항들을 구상하였다기보다는 이 제도의 구체화에는 명재상 을파소가 직접 관여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즉 보릿고개부터 곡식을 수확하기 직전까지의 곡식이 부족한 기간 동안에는 필요시 정부에서 보관중인 곡식을 가족구성원의 수에 비례하여 대여해준다. 그리고 추수가 끝나고 겨울 10월이 되면 그때까지 빌린 것을 되갚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해에 추수가 끝나면 돌려받을 수 있다는 예측이 가능하기에 미래의 수확분을 담보로 한 정부의 신용 공여로써 어차피 쌓여만 있는 국가의 재정을 유동화하여 대출해주는 일종의 생산적 복지대책인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결국 나중에 회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담보인 셈이어서 위험이 거의 없고, 국민 입장에서는 내가 낸 것을 급할 때 잠시 돌려받았다가 수입이 발생하면 그때 가서 상환할 수 있으니 생활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이 되는 참신한 발상이었다.

  그 동안의 방식이 긴급 빈민구휼로 사회안전망을 운영해온 초보적인 형태였다면, 새로 도입한 방식은 이제 공식적으로 매년 국가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되어 일반 국민들이 필요에 따라 편의를 제공받고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아예 제도로서 구체화시켰다는 것이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자 근본적으로 국가가 일종의 대국민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한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왕의 문제제기가 을파소를 비롯한 창의적인 실무자들을 거쳐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항구적 제도로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농민의 실생활은 잘 몰라도 올바른 현실 판단을 통해 비전을 제시하는 왕과 그 자신이 농민으로 살아본 을파소가 현장 감각을 통해 보좌하는 완벽한 조화가 그 시너지를 발휘한 셈이다. 고구려의 국민들은 이 제도의 도입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진대법(賑貸法)이라 부른다. 진(賑)은 흉년에 굶주리는 이들에게 곡식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하고, 대(貸)는 봄에 곡식을 대여해주고 가을 추수 후에 다시 돌려받는 것을 뜻한다. 즉 긴급구휼과 상시적인 대출제도를 결합하여 나름 체계화된 형태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것이었다. 최하층민에 대한 안전장치로는 진(賑)을, 그 다음 한시적 유동성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차상위 계층에 대해서는 대(貸)를 시스템적으로 제공하는 다층적 복지제도를 구축한 것이니 나름 그 체계적인 접근이 꽤 신선하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실제 생활에서의 경험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제도이다. 현대사회의 각종 제도들에 비하면 물론 단순한 형태에 불과하지만 당시가 일반 국민은 단지 생산력 그리고 군사력의 제공 대상으로 간주되던 고대사회였음을 감안해보면 이만큼이라도 사회보장제도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더군다나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방식을 처음 고안해낸 것은 충분히 인정해줄 만하다.

  이 진대법은 이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의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 조선시대의 상평·환곡(還穀)의 제도로 이어지는 동양적인 사회복지정책의 준거가 되었다. 두 명의 위대한 천재가 처음 씨앗을 뿌린 제도가 2천년 가까이 살아남아 더더욱 확대 발전하여 오늘날 현대사회에도 깊게 뿌리를 내리게 한 최고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왕의 재위 19년에 접어든 서기 197년에는 중국의 수많은 한인(漢人)들이 고구려로 대규모 망명을 해오기 시작했다. 이때는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인데,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의 시대가 한참 펼쳐지고 있던 그 무렵이었다. 187년 황건적의 난으로 촉발된 후한의 쇠락은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독재, 이각과 곽사의 난 그리고 낙양 천도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196년 가을 드디어 조조는 헌제를 낙양에서 옹립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이어 200년에 벌어진 원소와 일전을 벌인 관도대전을 통해 사실상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아마도 이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살았던 중국의 한인들이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가까우면서도 평화를 구가하고 있던 고구려가 피난처로 제격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진대법이라는 당시 어느 나라도 도입하지 못한 체계적인 사회복지제도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면 그 유인의 효과는 더 컸을 게 분명하다. 당대에는 인력이 말 그대로 휴먼 리소스(Human Resource)였던 시절이라 항상 노동력이 절실하였는데, 고구려 입장에서도 외교적 마찰만 없다면 이들 피난인들이 굳이 부담만 되지는 않았었으리라 여겨진다. 유휴 토지는 언제나 있었고 농사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인력을 투입하면 투입하는 대로 그에 비례해 결과물을 산출해내는 역할을 하기에 아마 고구려 정부에서도 이들의 노동력 활용을 위한 정착과 안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처리의 주체는 역시 국상 을파소가 나섰을 것이다.

  그해 여름 5월 다사다난했던 19년의 재위를 마치고 왕이 세상을 떠났다. 무명이었던 을파소를 발굴하여 기꺼이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해주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신뢰의 동반자이자 위대한 왕의 서거였다. 일명 국양(國壤)이라고도 하는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내고, 그 지명을 따서 묘호로서 시호를 고국천왕(故國川王)이라 하였다.

  을파소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였어도 국상의 자리를 유지한다. 다음 왕위를 이은 이는 고국천왕의 동생 고연우(高延優)였다. 사후에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이라는 시호를 얻게 되는 그는 별칭으로 위궁(位宮)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고 태어났다고 하는 고구려의 제6대 태조대왕 고궁(高宮)과 닮았다고 해서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고구려말 '위(位)'를 붙여 위궁이라고 했던 것이다. 고국천왕이 부득이 아들이 없는 까닭에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다만 지금의 왕은 4형제 중 셋째로 바로 위에 고발기(高發歧)라는 둘째 형이 있었지만 큰형수이기도 한 왕후 우(于)씨와 결탁하여 왕위에 올랐기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격분한 고발기는 외세인 요동태수와 손을 잡고 공격해오는데, 막내동생인 고계수(高罽須)를 우군으로 확보한 왕이 최종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왕은 형수인 우씨와 결혼하여 다시 왕후로 삼았다. 고구려의 역사를 볼 때 자주 언급되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왕가 내부의 자중지란이 한창일 때 을파소의 모습은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왕이 등극한 이듬해인 198년 봄 2월에 환도성(丸都城)을 건설할 때 을파소도 관여했을 수 있지만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몇 년이 되도록 왕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갖지 못해 조급해 할 때 왕을 달래는 역할로 잠시 나타나는 게 전부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그가 다음 왕이 들어설 때 왕후를 선택하는 일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굳이 그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아마도 이 시기에 명목상의 국상의 자리는 유지했을지 몰라도 사실상의 실권은 대부분 빼앗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야심적인 왕의 등장과 권력욕 강한 외척의 대두로 인해 더 이상 국상 한 명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국상의 자리는 이제 그저 왕의 자문기구 정도로 전락한 듯했다. 그리고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수명을 헤아려 국상임에도 스스로 낮은 자세로 다음 왕의 왕권 안정에 기여라도 하자는 생각을 하였던 것은 아닐지 추측해볼 수 있다. 그에게는 고구려 사회의 평화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인 산상왕 재위 7년인 203년 가을 음력 8월, 국상 을파소가 세상을 뜨니 온 나라에서 통곡이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의 평화로운 시대를 이끈 한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모든 국민이 슬퍼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국상이었던 명림답부의 사망 당시 신대왕의 처우와 지금의 산상왕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신대왕은 직접 나서서 깊은 슬픔을 표현하며 7일 동안 업무를 중지한 것은 물론 고인의 영지인 질산까지 가서 예를 갖추고 장사지낸 다음 묘지기로 20개 가구를 두도록 하는 등 온갖 조치를 했지만,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을파소에 대해서는 산상왕이 무언가 눈에 보이게 한 일이 없었다.

  고구려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그 터전을 닦은 역사적 인물의 생애에 비해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무관심은 국민들의 애통함과 너무도 상반되었다. 이 모든 게 권력에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비정한 속성 때문이겠지만, 아마 을파소도 그런 현실을 잘 알았기 출사할 때 그만큼 고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그간의 노력 덕택에 그의 희망대로 사회 안정은 그 이후에도 줄곧 이어질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 참고 사료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열전」
  - 참고 서적 : 이익의 『성호사설』과 『성호전집』, 안정복의 『순암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