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결혼이란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애할 때는 몰라도 결혼이 눈 앞에 다가오면 누구나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결혼은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간혹 한 순간 외모에 넋을 잃고 불꽃같은 사랑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순전히 호르몬 탓이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동물도 얼마든지 한 눈에 반하고 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오히려 진정 사랑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다.
어차피 식을 수밖에 없는 감성만으로는 결혼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오히려 호르몬의 영향으로 한 눈 팔기 십상인 것이 감성에 기반을 둔 1차원적인 사랑일 따름이다. 사랑이란 결국 냉철한 이성과 그에 기반한 서로간의 믿음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관계라고 하면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성과 신뢰로 사랑을 지킨 인물이 있기에 여기서 소개해본다.
신라시대에 중원경(지금의 충북 충주) 사량 지방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나중에 왕으로부터 “강수”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나마(17관등 중 11위)라는 그다지 높은 위치는 아니었던 관료 출신의 석체(昔諦)였으며, 아버지의 직위나 그 이후 행적으로 미루어 보건데 집안 자체는 6두품 출신의 견실한 가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 뒤가 뿔처럼 약간 튀어 나와 있어서 소의 머리같다고 하여 우두(牛頭)라고 이름 지었다. 이런 머리 모양을 기이하게 여긴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사람에게 데려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성현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면서 그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다 합니다. 아이의 머리를 보니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한 인물이 될 것이오.”
아버지는 돌아와서 자신의 아내에게 잘 당부하였다.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닐 테니 잘 키워주세요. 분명 장래에 나라의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강수는 자라면서 스스로 글 읽는 법을 배워 그 뜻을 금새 깨우쳤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의 장래 희망을 물어보았다.
“너는 불교를 배우고 싶으냐, 아니면 유학을 배우겠느냐?”
어린 강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는 불교는 속세를 떠난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저는 속세 사람이니 어찌 불교를 배우겠습니까? 유학을 배워보고자 합니다.”
스승에게 찾아가 유학의 고전들을 배우고 익혔는데, 들은 것이 적어도 스스로 깨달은 것은 깊고 커서 신라 사회에서 인재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곧 정부의 관직도 얻었다.
강수는 어렸을 적 천민들이 사는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사귀면서 정이 깊게 들어 남몰래 결혼을 약속하였었는데, 나이 20세가 되자 그 부모가 동네에서 용모와 행실을 두루 갖춘 여인을 찾아서 아내로 맞게 하려 하자 강수는 두 번 결혼할 수 없다며 그 뜻을 거역하였다. 아버지는 이에 크게 화가 나 이렇게 꾸짖었다.
“넌 지금 크게 명성을 얻어 이 나라에서 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사람을 배필로 삼는 것이 수치가 아니겠느냐!”
강수는 거듭 대답하였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듣기로는 옛 사람의 말에 ‘어려움을 함께 한 아내는 마루에도 내려보내지 아니하고 가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저는 이러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지조 있는 답변에는 아무리 아버지여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당나라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조서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김춘추가 강수를 불러 의견을 물어보니 그는 조서를 한번 보고는 막힘 없이 해석해보였다. 김춘추는 기뻐하면서 그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이름을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원래 임나가라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라고 합니다.”
김춘추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의 머리 뼈를 보니 강수 선생이라 불러야겠소.”
쇠머리(牛頭)보다 센머리(强首)가 어울리겠다는 김춘추의 장난 섞인 말투가 느껴진다. 어쨌거나 이때부터 그는 우두라는 본명보다는 강수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에게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회답하는 표문을 작성하게 하였는데, 문장도 빼어났고 내용도 매우 좋았다. 김춘추가 더욱 기특하게 여겨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특별히 임나 출신 선생님이란 뜻으로 ‘임생(任生)’이라 불렀다고 한다.

강수는 워낙에 집안 재정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집이 가난했어도 즐거워하였는데, 이후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그는 매년 벼 100석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시대마다 도량형의 단위는 자주 바뀌지만 어쨌든 벼 1석을 200kg 정도라고 했을 때 도정을 하면 쌀 144kg 가량 되므로, 지금의 쌀 가격 10kg을 평균 3만원으로 쳐서 금액으로 환산해보면 대략 연봉 4천3백만원이 되는 셈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무왕 김법민은 나당 전쟁이 마무리된 직후인 673년에 강수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강수는 문장을 담당하여 글로써 중국은 물론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우리의 뜻을 잘 전달한 덕에 대외 관계를 잘 맺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선왕께서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무공이라 하겠지만 또한 문장의 역할도 컸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그를 사찬(17관등 중 8위)으로 승진시키면서 녹으로 매년 벼 200석을 더 내려주었다. 한 마디로 기존 대비 3배로 급여가 뛴 셈이다. 오늘날로 치면 억대 연봉자로 껑충 오른 것이었다. 당시 그가 작성한 글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보낸 답글과 당 황제에게 보낸 화평을 요청하는 글 정도가 남아 있다.
강수의 문장 실력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660년 백제에 이어 668년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 신라는 서로 그간 숨겨두었던 발톱을 꺼내어 전쟁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마침 당나라게 가 있던 문무왕 김법민의 아들 김인문은 감옥에 갇혔고, 당나라는 계속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수년간 이어진 이 전쟁에서 당나라가 그 작은 신라 하나를 당하지 못하자 당나라 고종도 사실 이 전쟁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어 고민을 하던 무렵이었다. 김인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던 한림랑 박문준이 그런 고종에게 괜찮은 명분을 주었다. 고종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저희들은 당나라에 온 지 어언 10여 년이 되어 본국의 일은 잘 알지 못하지만, 멀리서 한 가지 소문을 들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새로 천왕사를 짓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불법을 강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은 신라와의 소모적인 전쟁에서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아 철수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마침 그 물꼬를 달변으로 소문난 박문준이 터준 셈이었다. 이에 고종은 크게 기뻐하여 예부시랑 낙붕귀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그 사실을 확인케 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신라의 당에 대한 지극정성을 핑계로 전쟁 종결을 선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사실 이는 변명에 불과했고, 천왕사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절이었기에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정부는 부랴부랴 그 남쪽에 새로 절을 만들었지만, 이때 사신으로 온 낙붕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겨우 뇌물로 그를 달래어 황제에게 좋게좋게 보고하게 한 다음, 다행히 상대방이 우호적 분위기로 돌아선 것을 확인하고 당나라에 보낼 김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글을 짓도록 한 것이 바로 강수였다.
그의 글을 본 황제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탄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김인문 일행을 풀려나 본국으로의 귀환을 서둘렀는데, 안타깝게도 김인문은 돌아오는 배편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일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것인데, 실제 역사기록과는 조금 차이가 있어서 당대에 강수의 문장 실력이 얼마나 유명했었는지를 말해주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강수는 문무왕 다음 대인 신문왕 때에 세상을 떴다. 장례는 정부에서 치러주었고, 부의로 의복과 비단 등을 내려준 것이 매우 많았지만 그 집 사람들이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썼다고 한다. 아마도 그 아내의 의향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곧 그의 아내가 먹을 것이 모자라 그간의 수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기에, 이를 알게 된 한 대신이 신문왕에게 청하여 벼 100석을 주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의식은 남편에게 의지하여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은 이제 홀몸이 되었는데 어찌 나라로부터 계속 후한 은혜를 받겠습니까?”
끝내 아무 것도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과연 그 남편에 그 아내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그런 아내였기에 강수는 부모의 강권이나 주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지켰던 것이 아닐까. 강수가 연애했던 나이를 고려해보면 대략 그녀 또한 동갑 내지 또래였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겠다. 그녀와의 결혼은 강수의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 참고 사료 : 『삼국사기』「신라본기」 및 「열전」,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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