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년 겨울 11월의 첫날, 고려 개경 한복판에서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인 6위(衛)의 군사들이 단체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소란스럽게 궁궐로 난입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노리던 두 명을 붙잡아서는 딱 죽지 않을 만큼 마구 폭행을 가했다. 그 다음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가 국왕의 면전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쿠데타 배경을 설명하였다.
“저들이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것은 자신들 이익을 위해서였지 결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신발에 발을 맞춘다고 억지로 발가락을 자른다면 그 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군사들은 울분과 원한을 참지 못하겠으니, 부디 나라의 좀벌레를 제거하여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주십시오.”
국왕도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뜻을 함부로 거스를 수가 없었기에, 일단 요청받은 대로 그 두 명을 즉각 해임하고 멀리 유배 보냈다.
이외에는 자세한 상황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군사 쿠데타 치고는 유혈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쿠데타 과정에서 사망자 기록은 전무하고 더욱이 주요 타깃이었던 두 명도 죽이지 않고 유배형에 처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쿠데타는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론 쿠데타 시도는 고려 건국 초부터 최근까지도 계속 있어 왔고 일부는 심지어 성공한 적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차기 왕권을 둘러싼 권력 다툼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 쿠데타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무신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라는 점이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주역은 상장군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었다. 두 명 다 1010년에 벌어진 제2차 거란-고려 전쟁 당시 탁월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당시 기습부대의 장군이었던 김훈은 승세를 타고 밀고 들어오는 거란군을 매복공격으로 패퇴시킴으로써 자칫 고려군 전체가 붕괴될 뻔한 상황을 막아냈고, 최전방인 통주(通州)에서 중랑장으로 있던 최질 역시 항복을 압박해오는 거란측에 대항해 일치단결하여 통주성을 지켜냄으로써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애국자에 전쟁영웅으로 불러도 분명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로부터 4년 후인 이 당시에 둘 다 상장군이라는 군 최고지위에 올라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한편 이들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 이들은 거꾸로 둘 다 문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 ?~1015)는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가 후삼국시대에 사회적 혼란을 피해 중국 오월(吳越, 오늘날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등지) 지역으로 피난갔다가 간 김에 중국어를 배워서 귀국한 특이 케이스이다. 당시 광종은 아버지의 중국어 실력을 높게 사서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매번 그를 투입할 정도였다. 그의 아들 장연우도 나름 업무처리 능력을 널리 인정받았는데, 제2차 거란-고려 전쟁 당시 고려군 총지휘관인 강조의 곁에 있던 두 명의 부지휘관 중 한 명이 그였다. 또한 지금 국왕이 거란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급히 피신하였을 때 위험에 빠진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이도 바로 장연우였다. 전후에는 중추사(中樞使),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추밀사(樞密使) 등을 역임하였는데, 추밀원과 중추원은 명칭의 변경만 있을 뿐 국왕의 비서실같은 역할이었고, 어사대는 주로 관리들의 잘못을 감찰하는 곳이었다.
나머지 한 명인 황보유의(皇甫兪義, ?~1042)는 지금 국왕의 즉위를 도운 공신으로, 그의 선조 역시 태조 왕건 때부터 활약한 경력도 있었다. 이때는 중추원에서 일직원(日直員)으로 근무중이었다. 일직원은 이름 그대로 매일 번갈아 국왕의 곁을 따르는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얼마 후에는 좌·우 두 명의 승선(承宣)으로 변경되게 된다. 중추원사였던 장연우의 바로 아래로, 정3품급이었으니 상당히 고위직이었다. 이상과 같이 장연우나 황보유의 모두 현 국왕 입장에서는 깊이 믿을 만한 측근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이때 고려의 국왕은 23세의 젊은 현종(顯宗) 왕순(王詢, 992~1031)이었다. 그는 즉위 전에 이미 이모인 천추태후의 집중 견제를 받아 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넘어야 했고, 또 18세의 나이에 가까스로 즉위한 이후에도 거란의 요나라가 대규모 침공을 벌이는 바람에 급하게 수도 개경을 버리고 멀리 남녘 땅으로 피신을 떠나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해본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산전수전 다 겪은 현종의 치세에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일까?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경제적인 이유, 간접적으로는 뿌리 깊은 무신 차별에서 기인하였다.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면, 제2차 거란-고려 전쟁 이래로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대의 정원을 늘렸는데, 이로 인해 군사비 지출이 폭증하였고 자연히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서 관리들의 월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이에 황보유의가 장연우와 함께 건의하여 중앙군 소속 군인들의 밥줄인 영업전(永業田)을 거두어 관리 급여에 충당하게 하니 무신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차별 문제로 불평불만이 쏟아져나왔다. 더욱이 최질의 경우엔 전쟁에서의 공적이 뚜렷하여 무관으로서 여러 차례 승진은 하였지만 기대하였던 문관의 직책은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불만이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였다. 결국 이때에 이르러 김훈과 최질을 중심으로 박성(朴成), 이협(李恊), 이상(李翔), 이섬(李暹), 석방현(石邦賢), 최가정(崔可貞), 공문(恭文), 임맹(林猛) 등이 문신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는 군인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긴 일을 빌미로 분노가 격화된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끌어들여 고려 최초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다만 이들의 쿠데타는 이후의 과정을 지켜보면 상당 부분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두 명을 처벌한 다음 그들이 한 행동은 이틀 후에 취해진 조치 외에는 별다른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조치 하나가 이들의 그간의 심정을 모두 대변하는 것이었다.
11월 3일, 쿠데타 주도자들이 국왕에게 요구한 것은 상참(常參) 이상의 무관은 모두 문관을 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상참은 매일 아침 국왕에게 조회 문안을 드리는 문무백관을 의미하는데, 당시에는 5일에 한 번씩 대신들이 알현하는 자리였다. 문신은 6품 이상, 무신은 중랑장 이상이 참석 대상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이는 아마도 불만이 컸던 최질의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한편 잘 생각해보면 그 동안 무신들이 얼마나 문신의 자리를 원했었는지를 알 수가 있는 부분이다. 예컨대 군대 파병이 이루어질 때에도 최고지휘관은 언제나 문신이 맡아서 작전계획을 세웠고 무신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무신들은 승진의 폭이 좁았다면 문신들은 정부의 모든 자리가 그들이 갈 수 있는 자리였고 말이다. 그래서 이때 무신들이 요구한 것은 그러한 불평등을 해소해달라는 강한 어필이기도 했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더 있었는데, 약간 독특하게도 두 개의 정부 조직을 개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대상은 어사대(御史臺)와 삼사(三司)였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감찰실에 해당하는 어사대는 장연우가 근무하였던 조직이기도 했는데, 아마도 무신들이 이 어사대 때문에 곤욕을 치를 일이 많아서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들은 어사대 대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면서 상주 인원을 빼버림으로써 사실상 어사대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런데 삼사는 이 당시 무신들과 직접적으로 무슨 연관이 있을지 알기 어렵다. 이 조직은 중앙과 지방의 재정을 총괄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삼사 대신 새로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하였을 뿐이다. 짐작컨대 무신들의 목표는 그저 돈줄을 쥐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허나 어사대는 현종이 곧바로 원래대로 돌리는 반면 삼사는 거의 10년이 다 되어서야 원복을 시킨 것을 보면, 이 조치만큼은 당시 국왕 입장에서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힘없는 현종은 무신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군사 쿠데타는 고려 역사 전체에서 처음이었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례도 없고, 모두가 다들 당황과 혼란 속에서 사태를 지켜볼 뿐이었을 것이다.
이는 무신들도 사실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칼은 들었으되 그 칼을 정치에서는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해 했다. 불과 며칠 후인 11월 8일에 돌았던 뜬소문 하나로 인해 그들의 한계는 명확해졌다. 개경의 북쪽 산에 있는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군대를 일으켜 수도로 남진해 오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것이다. 이에 무신들이 주축이 되어 있던 개경 정부는 크게 놀라서 급히 경계태세를 격상시켰다. 결국엔 준비 없이 쿠데타를 성공한 이들 역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 없었던 셈이다.
그들이 약 한 달간의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뭐니뭐니 해도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2월 5일, 여러 정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선 대대적인 사면령이 발표되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사면은 정부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인기 영합 정책이었다. 유배형 미만의 죄수는 모두 사면, 그외 사형부터 유배형까지는 형량 감경이 결정되었다. 물론 무신들도 뒤끝은 있어서 유일하게 황보유의와 장연우만큼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였다. 그외의 유배에 처해졌던 죄수들은 모두 지근거리로 옮겨졌다.
또한 개경 주민들에게는 곡식이 전격적으로 선물로 주어졌고, 7품 이하의 낮은 문관들 중에서도 20년 이상 된 이들은 차례대로 진급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고려의 기본 토지제도인 전시과(田柴科, 관리들에게 토지와 땔감의 땅을 나누어주는 제도)를 바탕으로 문·무 양반 전체와 하위 관원에게 전시(田柴)가 추가로 지급되었다. 나아가 문·무 양반 중 5품 이상에게는 아들, 손자, 아우, 조카 중 한 명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더욱이 태조 때 공신의 후손도 관직에 기용하였다. 끝으로, 이 해 조세를 절반으로 감면해주는 것은 물론 이로부터 2년 전인 1012년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 체납된 조세는 탕감해주는 특별 조치가 이어졌다.
이 정도의 재정지출을 과연 계산이나 하고 집행했을까 싶을 정도의 무리한 정책이었는데, 이는 거꾸로 보면 얼마나 이 당시 무신 집권자들이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고 다 때려넣자는 식으로 일처리를 하였던 것은 아니었나 짐작해볼 수 있을 듯하다. 문제는 총 국내생산은 그대로인데 지출만 잔뜩 늘어났으니 늘어난 세금부담은 고스란이 고려 민중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정치 상황을 역사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마음대로 문신의 직책을 겸하였다. 정사에 문외한인 이들이 정부 요직에 포진하자 정치가 중구난방으로 되니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이들의 무신천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계기는 서경에서 시작되었다.
1014년 연말 즈음, 이러한 무신들의 난행을 크게 걱정하던 한 정의감 넘치는 관리가 비밀리에 중추원의 또 다른 일직원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귀뜸해주었다.
“왕께서는 어찌 한 고조의 운몽(雲夢)에서의 일을 참고하지 않으시는 것이오?”
이는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劉邦)이 운몽에서 노닌다는 이유로 제후들을 불러들였고 이때 장군 한신(韓信)을 붙잡아 실각시켰던 고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한신 입장에서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 하며 억울함을 토로하였지만, 사실 권력자 입장에서는 속성상 2인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본질 그대로 행동하였던 것뿐이다. 어쨌거나 이는 당시 고려의 무신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한 칼에 처단할 것을 제안하는 상당히 대담한 작전이었다.
이를 제안한 것은 이자림(李子琳, ?~1034)으로, 원래 지금의 충북 청주 출신이었지만 성종 때인 995년에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서경 장서기(掌書記)로 임명되면서 서경과 연을 갖게 되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고려의 동북바 최전선을 담당하는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까지 역임하고는 임기를 마치고 이때 개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컨택한 상대는 김맹(金猛, ?~1030)이었는데, 그의 집안 역시 지금의 경남 양산이 기반으로 서경과 직접 상관은 없었으나 할아버지 때 서경으로 이주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자림과 마찬가지로 그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었다. 이 둘이 코드가 맞았던 것은 둘 다 서경 인연에 과거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혹 이 둘은 함께 과거 합격을 한 사이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김맹은 이자림의 곧바로 현종에게 몰래 보고하였고, 문신들의 말도 안 되는 압박에 치를 떨던 현종은 그 계획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스스로 권력을 쥐는 것에 민감하였던 국왕이었던 만큼 현종은 과단성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일은 극비리에, 그리고 동시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자림이 과거 서경에서 처음 장서기로 근무할 때 당시 크게 민심을 얻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번에 다시 그를 임시 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으로 임명하여 서경으로 파견하였다. 물론 실제 목적은 먼저 가서 모든 준비를 미리 마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자림은 일처리도 확실했다. 서경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는 불과 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들의 디데이는 3월로 정해졌다. 그리고 현종은 1015년 3월 3일 무신 지휘부를 모두 대동하여 서경을 전격 방문하였다. 아마도 이때의 대외적인 명목은 무신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유흥인 것처럼 포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3월 14일에 현종은 서경의 장락궁(長樂宮)에 무신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마치 연개소문이 평양에서 180여 명의 정적들을 제거할 때 연회를 빌미 삼았던 것과 장소와 목적 둘 다 똑같았다.
무신들이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이자림은 준비해둔 서경 군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기습하여 그 자리에서 모두 칼로 베어버렸다. 대상은 총 19명이었다. 주동자였던 김훈과 최질 두 명은 물론이고, 쿠데타에 적극 동조했던 이협, 최가정, 석방현, 이섬, 임맹, 그리고 역할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사후에 무신 지휘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이는 김정열(金貞悅), 효암(孝嵓), 끝으로 문신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무신들 편에 서서 미운털이 박혀 있던 병부낭중(兵部郞中) 최구(崔龜)가 그들이었다.
이자림이 주도한 친위 쿠데타는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권력을 되찾은 현종은 무신 쿠데타 세력의 가족과 친인척을 모두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하였다. 그가 개경으로 돌아온 것은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인 4월이었다.
그 다음 한 일들은 기존 문신의 복권과 무신들의 행정처분을 원복시키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장연우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임명하였고, 또 무신들이 설치를 요청했던 금오대를 폐지하고 새롭게 사헌대(司憲臺)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현종의 장점은 일처리를 할 때 하나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기존 무신들의 불만에도 약간은 귀를 기울일줄도 알았다. 무신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우대 조치와 또 쿠데타를 벌였던 이들에 대한 일부 처벌 완화도 그가 한 일이었다.
(7월) 흥화진(興化鎭)의 장군 정신용(鄭神勇)은 대장군으로 승진 및 군사 12,500명 모두 관등을 높여 포상 (작년 1014년 겨울 10월에 거란이 통주(通州)를 침략해오자 이들이 반격하여 격퇴한 공로가 있음)
(1016년 2월) 무신 쿠데타 세력으로 연좌되었던 이들을 방면 (단, 그 아들과 친형제는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되 통상적인 사면에서는 제외)
끝으로 공신에 대한 포상도 잊지 않았다. 가장 큰 공로는 물론 이자림이었다. 친위 쿠데타 후에 이자림은 이름을 바꿔 이가도(李可道)라고 불리게 되는데, 스스로 개명한 것인지 현종의 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가도는 이후 현종에게 크게 쓰이는데, 나중에 일꾼 238,938명에 장인 8,450명까지 대규모로 동원하여 개경에 나성(羅城)을 처음 쌓은 것도 그였고, 그 덕분에 1029년에 현종에게 왕가의 성씨를 사성받았다. 그래서 역사서에서는 최종적으로 그가 왕가도(王可道)로 기록되게 된다. 추가로 그의 부인도 개성군(開城郡)부인으로 높여 부르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종은 왕가도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임으로써 공신으로서의 대우를 확실히 해주었다. 다만 13명의 부인 중 9위로 아주 높은 순위는 아니었다. 또한 둘 사이에 자식도 없는 것을 보면 이것만큼은 현종이 원해서가 아니라 왕가도의 개인적인 청을 들어준 것이라서 그런 듯하다.
그런데 왕가도의 혈통은 다른 루트로 왕가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셋째 딸이 이정(李頲, 1025~1077)과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 곧 이자의(李資義, ?~1095)로, 후에 어린 국왕인 헌종(獻宗)을 보위하다가 그의 숙부인 숙종(肅宗)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거되는 인물이다. 그보다 좀 더 유명한 인물은 이자의의 사촌인 이자겸(李資謙, ?~1126)인데, 예정과 인종의 장인으로 권세를 부리다가 친위 쿠데타로 제거됨으로써 이자겸의 난의 주인공이 된다. 또 왕가도의 외손자 왕원(王源, 1083~1170)은 숙종의 사위가 된다. 여러모로 왕가도는 현종 때 친위 쿠데타를 성공시킨 공로로 핏줄로써 고려 왕실과 연을 짙게 맺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고려 왕실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자칫 위태로울 뻔했던 상황을 왕가도같은 공신 덕분에 잘 막아낼 수 있었지만, 이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로부터 150여 년 후에 똑같은 상황이 훨씬 심각한 조건으로 재발하게 된다. 이를 역사에서는 ‘무신정변’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보다 앞서 벌어졌던 이때의 무신정변은 본편에 앞서는 프리퀄(Prequel)로 부를 만할 듯하다. 역사는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이들에 의해 의외로 자주 반복된다.
# 참고자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정(李頲) 묘지명, 왕원(王源, 왕가도의 외손자) 묘지명, 현화사(玄化寺)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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